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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괴로웠으면 좋겠다.

MN(엠엔) 2020. 1. 28. 03:44

※ <중력>, <중력:궤도> 내용 언급

 

 

 

 

 

<중력:궤도> 강재희에게.

 

살아있지도 않은 창작물 캐릭터에게 편지를 쓰는 셈인가.

 

 

 

<중력>을 읽고 나서, 이 글에는 외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땐 그랬다. 완결 이후로 무슨 일이 발생하든 차학윤과 강재희 사이에만 존재하는, 둘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런데 <중력:궤도>가 출간되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이 두 사람 감정에 변화가 생길 수 있나?

난 로맨스를 다루는 작품에서는 웬만해선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내가 읽는 BL소설에서는 주연 두 명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근데 강재희가 행복을 느끼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 편하지 않다. BL소설이니까 주인공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강재희가 행복하면 이상할 것 같다. 이상한 감정이다.

진짜 이상한 감정이다ㅋㅋㅋㅋㅋ 피폐물, 진짜 정신 나간 미친 캐릭터 나오는 작품을 보면서도 이상하게 강재희한테는 마음이 가지 않는다. 차라리 처음부터 양심이라곤 없는 캐릭터로 등장했으면 덜 했을까? 아예 변화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캐릭터들과 달리 이쪽은 캐릭터의 감정이 변화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나도 참 이중적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가장 거슬린 건 강재희 범죄사실을 아는 주변 사람들 반응이었다. 직장상사 그리고 담당 형사였던 아버지. 차학윤 앞에서 강재희 두둔하는 듯한 태도가 거슬린다. 감옥에 살다 나왔으니 죗값을 다 치른 건가요? 남의 일이니까 혹은 현재의 강재희는 안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는 강재희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러면 죄를 뉘우쳤으니 두둔해도 되나요?

그럼에도 끝까지 이 글을 읽을 수 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범행 당사자였던 강재희 때문이었다.

범죄를 저질렀고 삶에 썩 미련은 없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타인과 관계 갖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강재희. 강재희 행동 일부가 이해가지 않더라도 강재희는 그래도 죄책감을 느낀다. 주변 사람이 자신을 감싸들려고 해도 명백히 자신의 범죄 행위를 알고 그것에는 그다지 변명하는 태도가 없다. 덧붙여, 강재희 단독으로 저지른 일인지 강재희가 범죄를 도운 것인지 작가는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작가 의도일텐데, 여러 의미가 있겠다만 누구의 주도로 벌어진 일인지 명확히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강재희는 분명 이 사건에 관여한 바가 있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강재희를 두둔하지 않는다.

어쨌든 글에 언급된 내용으로 보자면 강재희는 죄책감을 느끼며 차학윤은 강재희를 쉽게 용서해주지 않았다는 점이, 정말 이상하게도 그렇기에 난 안심되었다. 내가 BL소설 주연들에게 바라는 해피엔딩이 아닌데, 아니라서 다행인 아이러니한 상황.

 

 

 

<중력:궤도> 출간 소식을 듣고, 소설을 읽기 전부터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가 바뀌겠구나 짐작했다. '알고 보니 강재희가 범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면 외전에서 다룰 수 있는 건 차학윤의 변화뿐이다. 본편에서도 내내 괴로워하던 차학윤만이 이 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차학윤이 관계를 끊어버리면 두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고, 차학윤이 자신의 괴로움과 원망을 다 끌어안으면서도 강재희와 같이 가겠다고 결심한다면 그리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랬다.

아이고, 차학윤. 어쩌다 이런 인간과 얽혀서. '어쩌다 운 나쁘게'라고 여겼다.

만약 강재희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범죄 사실을 알았다면 차학윤은 마음을 접었을 거다. 그런데 이미 잔뜩 엉키고 엉킨 상태에서 갑자기 얘가 내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다. 알게 될 거면 진작 알려주지, 본인 감정 확고히 정했고 얘와 같이 살고 싶었는데 이제와서는 발을 빼려고 해도 뺄 수가 없다. 거기다 갑자기 얘가 내 앞에 뛰어들어 대신 칼을 맞는다. 강재희 동생은 사망하질 않나, 강재희는 내 대신 칼에 찔리질 않나. 아무 일 없었어도 강재희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소멸시키기가 힘든데 자꾸 사건이 터지고 차학윤은 자꾸 강재희에게 시선이 간다.

아. 대체 차학윤, 네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어쩌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다만 학윤은 좀처럼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내 얼굴을 샅샅이 살피듯 지그시 들여다보다, 곧이어 조금 주저하는 투로 숫접게 물음을 던져 왔다.

“밤에 비 왔을 때, …괜찮았어?”

중력 : 궤도 2권 | 쏘날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3086000483

 

 

 

차학윤이 좀 불쌍하게 느껴졌다. 불쌍하다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은 거 안다. 굳이 대체하자면 안쓰럽다, 정도?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상대를 앞두고 이런 말 밖에 할 수 없을 차학윤에게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매몰차게 대해도 상관없어야 할 상대를 앞에 두고 있잖아? 그런데도 이런 언행밖에 못하는 것이다. 차학윤은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 아니다. 충분히 타인과 거리 둘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주먹 날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눈 앞의 상대에게는 그럴 수 없다.

 

 

 

“널 정말, 어떡하면 좋지…….”

아득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탁한 음성으로 읊조려 왔다. 

중력 : 궤도 2권 | 쏘날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3086000483

 

 

 

차학윤, 너야말로 정말 어떡하면 좋지?

강재희를 앞에 두고 고작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차학윤이. 아. 좀. 그래. 불쌍하다.

강재희 시점에서도 느껴지는 차학윤의 고뇌가 보일 때마다 난 강재희에 대해서 생각한다.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흘릴 남자를. 차학윤 앞에서 강재희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강재희가 범죄 피해자가 되길 바라는 게 아니다. 하지만 강재희가 차학윤에게 느낄 감정보다 차학윤이 강재희에게 느낄 감정이 더 고통스럽잖아? 범죄 사실을 알게 된 후 이제 차학윤에게는 짐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강재희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이 관계의 미래를 결단내려야 하는 사람이 차학윤이기 때문에.

 

강재희는 자기 삶이 끝날지언정 우선 차학윤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차학윤을 두 번 보호한다. 두 사건으로 강재희는 큰 부상을 입는데 다친 강재희의 눈을 통해서 난 차학윤의 감정을 읽는다. 차학윤에게 있어 진정 강재희가 없는 삶이 행복일까? 아닐지도. 아니겠네. 차학윤이 강재희와 같이 있기를 선택한다 하여도, 타인인 내가 창작물 속 캐릭터의 선택을 훼방 놓을 수 없다. 차학윤에게 미친 XX, 정신 나간 XX라고 욕할 수가 없다. 창작물 캐릭터 아닌가, 욕할 필요도 없다.

이것이 BL소설인 이상 차학윤이 강재희와의 미래를 선택하리란 걸 짐작하고 있으므로, 다만 내가 바라는 건 강재희가 살면서 부디 괴로워하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이처럼 절박하게 생을 소망한 적이 없었다. 살고 싶었다, 그와 함께 더 오래, 살아가고 싶다.

중력 : 궤도 2권 | 쏘날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3086000483

 

 

 

강재희야. 난 네가 괴로웠으면 좋겠다. 악몽을 꾸든 사고를 당하든 네가 어떤 고통을 겪어도 난 아마 슬프지 않을 것 같다.

강재희의 과거 행위는 변함이 없고 차학윤은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설령 차학윤이 강재희와의 관계를 제 손으로 끊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느낄지라도 차학윤은 그 마음마저 안고 가야 한다. 그래서 생을 바라는 강재희를 보면 동시에 (살기를 바라는 강재희의) 얼굴을 보고 있을 차학윤을 떠올린다.

 

 

 

“진정 좀 됐어요?”

“…주, 죽는 줄 알았어…”

나는 여전히 얼빠진 상태로 울먹이듯 토로를 했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반말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안 둬.”

웃는 얼굴로 그런 나를 곧게 응시하며 그가 나직이 말을 받았다.

중력 2권 | 쏘날개 저

리디북스에서 자세히 보기: https://ridibooks.com/books/2495000134

 

 

 

강재희의 불행을 바랄수록 차학윤도 불행으로 빠지게 된다고 느낀 건, 이미 차학윤이 강재희를 살린 사람이고 앞으로도 살려줄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차학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운 나쁘게' 강재희와 얽혔을지언정 차학윤은 이제 이 늪과 같은 감정에서 발을 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리하기를 선택했다면 본인의 삶 속에 행복한 순간이 종종 찾아오기를 바란다. 내가 강재희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별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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