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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는 뜬금없는 일이 왕왕 벌어진다.

MN(엠엔) 2018. 10. 24. 16:02

 

틸 더 팻 레이디 싱(Till the Fat Lady Sings)

오프(OFF)

요미북스

 

조태정-고토 마사키

 

 

 

 

 

※ 내용 언급

 

 

 

 

 

인생에서는 뜬금없는 일이 왕왕 벌어진다. 아니다, 아주 많이, 항상 벌어진다.

 

 

 

분명 '하핫'하고 웃었다. 거참 옛스러운 웃음소리네, 하고 넘겼다. 그런데 한 번 더 웃는다. '푸핫'하고. 아니다. 먼저 나온 웃음소리가 푸핫, 이었던가. 아무튼.

믿을 수 없게도 그 순간 사랑에 빠졌다.

 

웃음소리 두 글자를 본 순간 '풋사과 같다'는 문장이 확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반한다. 고작 웃음소리에 반했다?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나조차도 당황했지만, 이렇게 뜬금없는 일은 항상 벌어지지.

 

이 캐릭터의 외모 묘사와 말투 등을 종합해보았을 때 '키 크고 마른데 단단한 몸을 가진 호타루(<빙과>의 오레키 호타루)' 느낌이다. 호타루 같이 생긴 사람이 푸하하 웃는 모습을 상상하니 머릿속에서, 사과 베어문 순간 푸른 색 사과즙이 톡 튀는 것 같다.

 

1권을 채 다 읽기도 전에, 이 캐릭터가 어떤 인간인지 알기도 전에, 제대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캐릭터를 바라보는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 제대로 읽기 전에 캐릭터에 애정이 생긴 채로 시작하여,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냉철한 시선, 이런 거 없다. 소설의 결말이 궁금하다든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알고 싶다든가, 하는 궁금증보다 오로지 조태정에 대한, 느닷없이 발생한 애정 덕에 끝까지 읽었다.

 

 

 

어느 작품이든 마찬가지이나 이 작품은 특히 미리보기를 읽고 구매해야 한다. 첫 문장부터 낯설어 작품과 멀어질 수 있기 때문. 난 이미 타인의 후기를 보고 대략 예상을 했지만 그럼에도 읽기 쉬운 글은 아니다. 캐릭터, 내용의 키워드만으로 지레짐작하면 막상 읽었을 때 예상과 다를 수 있다

 

인터넷에서 본 글에 따르면, 이 글은 2004~5년에 나왔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재일교포 작가가 일본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에서는 몇 년 후 그 작가의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재일교포 작가의 작품에는 재일 한국인이 등장하곤 하며(모든 작품인지는 모른다) 또한, 재일 한국인이 등장하는 일본 영화가 제작된 바 있다. 일본이나 한국에 재일 한국인이 잠깐이라도 화제가 된 시기이다.

 

조선학교나 재일 조선인(소설과 동일한 단어를 사용)에 관해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캐릭터도, 캐릭터들의 환경도 낯설다. 그런데 이 낯선 것들에 익숙해질 때쯤 가장 큰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나타난다.

그게 이 작품의 주연이자 주인수.

이 글을 읽고 통쾌함을 느낀다면 그건 이 작품의 주인공과 주인수를 인간 대 인간보다는 재일조선인-일본인 관계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둘의 환경을 모두 제거하고 두 사람 자체만을 보기가 어렵다. 사람만 놓고 보아도 한국인이 고토에게 쉽게 정을 주기 힘들겠지만.

 

 

 

글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이 1권을 읽었다면 둘의 공수 관계를 뒤바꾸어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토가 가진 권력과 재일조선인을 바라보는 일본 내 시선 등 전복되지 않을 줄 알았던 단단한 구조가 감정으로 인해 생긴 권력 때문에 역전된다. 후반까지도 역전이라고 하기엔 좀 약하지만.

 

마찬가지로 인터넷에서 본 글에서는, BL 작품의 공수 구조를 깨는 것에 작가님이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면서 '한국인 공, 일본인을 깔아 봐'라는 생각으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내가 지금껏 본 작품들과 구조가 조금 다르다.

 

 

 

3인칭 시점이지만 글은 주인공의 시선에 머무른다. 참으로 신기한 점이, 3인칭 시점이고 조태정 입장에서만 서술되는데 정작 주인공 감정을 모르겠다. 조태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와 만나서 무얼 하는지도 다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정작 말과 행동만 드러나는 고토의 심리는 눈치챌 수 있는데 태정이가 고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는 독자마다 의견이 나뉜다

 

1인칭 시점 작품을 볼 때에는 태도가 두 가지로 나뉜다. 시점의 주인(화자)을 믿을 것인가, 믿지 않을 것인가. 일명 페이스 서술도 존재하므로.

주인공을 믿고 간다면 고토를 향한 태정의 감정에는 애정이 없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과연 이 작품에, 진짜 BL의 L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사람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 태정의 감정에 L이 있느냐? 난 고토를 향한 태정의 감정에는 호감이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호감보다는 뭔가 연애감정의 넓은 범위에 포함될 법한 감정을 말하는 건데, 마땅히 대체할 단어가 생각이 안 나네...

 

 

 

두 사람은 복합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연인이라기엔 단어 하나로 둘의 관계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L이 아리까리하다고 하여 육체적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몇 번의 관계를 맺은 후에야 처음으로 입맞춤이 이루어지는데... 하, 내가 본 모든 키스 장면 통틀어 가장 성적 긴장감이 폭발한다.

 

 

 

이 작가님의 다른 작품도 읽어봤는데 권력 내지는 관계 전복에 관심이 많으신 듯하다. 작가님의 글을 더 읽고 싶다.